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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바이러스 Part 72023-07-28 16:37
작성자 Level 10

1. chaos(혼돈) 

 


 

원자는 정확한 경계를 가지지 않으므로 크기를 측정하기 어렵지만 고체나 액체 상태에서 두 원자 간의 거리를 기준으로 어림잡아 추정하면 그 크기는 약 백억분의 1 미터(m), 100 피코미터(pm=1) 정도이다.1)2)3) 이렇게 작은 원자는 아주 불안정한 상태로 현실 세계에서는 두 개 이상의 원자가 결합한 분자4)의 형태(: O2, H2)나 전자를 버리거나 얻어 안정화된 이온5)의 형태(; Na+, Cl-)로 존재한다.


분자나 이온도 역시 원자처럼 작은 입자(粒子)6)이다. 이러한 입자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움직인다. 단단한 땅에 깊이 뿌리박은 고목도 우리가 바람7)이라고 부르는 공기 입자의 현란한 운동에 부딪혀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이 작은 입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자의 무질서한 운동은 그 수가 많아지면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위 그림은 기체 또는 액체에서 표류하는 입자의 무작위 운동8)을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각각의 입자는 서로 부딪히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하나가 떠난 공간을 다른 입자가 와서 채운다. 그 결과 전체 공간은 작은 입자로 가득 찬 균질한 상태가 된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얼음이 담긴 물에 뜨겁게 추출한 진한 커피를 타는 순간 커피 입자들은 물 분자와 무질서한 충돌을 일으키고 자유롭게 움직여 이내 물과 균일하게 섞인다.9) 물론 이 상태에서도 물 분자와 커피 입자는 계속 충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고운 빛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보일 뿐 서로 충돌하며 튕겨 나가는 입자들의 무질서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무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각은 물 분자와 커피 입자의 충돌을 눈치채지 못하고, 미각과 후각은 섞여 있는 물과 커피를 분리해서 맛보거나 냄새 맡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이 충돌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미 섞여버린 물과 커피를 손으로 잡아떼어 둘로 나눌 수도 없다. 이렇듯 우리의 오감(五感,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모두 이 세세한 입자의 움직임을 느낄 만큼 세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들이 한데 엉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고르게 잘 섞인 한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생각한다.


공간 속 입자가 서로 충돌하여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없는 우연(偶然)’한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의 입자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입자가 무수히 많아지면 무질서한 공간은 질서 정연한 공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는 입자들의 운동 방향과 위치를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작은 입자들의 무질서하고 우연한 운동이 입자의 수가 무수히 많아지면서 예측 가능한 필연(必然)’적 사건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에 커피를 넣으면 둘이 골고루 섞여 아메리카노가 될 거라 예측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물에 커피를 넣었을 때 커피 입자와 물 분자는 아메리카노를 만들 목적으로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들의 충돌은 그저 우연한 사건으로 각각의 입자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두 입자가 충분히 많을 경우 이 우연한 사건은 무한히 반복되며 결국 물과 커피가 고르게 섞이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2. cosmos(질서)

 

인체를 구성하는 원자는 왜 이리도 작은가? 우리 몸은 원자에 비해 왜 그렇게 커야만 하는가?’

 

물리법칙에 따라 무질서한 운동을 하는 원자는 불안정한 입자이므로 인체 내에서도 개별 원자가 일으키는 현상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약 인체가 적은 수의 원자로 이루어져있다면 생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몸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덕분에 인체라는 닫힌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통계적 예측이 가능한 질서 정연한 현상이 된다.

 

물론 일부 원자들이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림잡아 3.7 x 1027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큰 규모의 인체에서 일어나는 소규모의 불협화음은 통계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오차범위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생명은 이렇듯 인체가 다원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통계적 관점에서 입자들의 운동은 일정한 법칙을 준수하므로 소수 원자의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보호받고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한다.

 

우리의 무딘 감각도 우리가 생명을 원만히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만약 우리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서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분자 단위의 변화를 인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만약 세포 하나하나의 죽음에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초당 수십만 번, 하루에 천억 번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감각기관은 아주 무디고 우리 뇌는 이런 사소한 신호를 무시하므로 숱한 세포가 죽어 나가는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질서를 영유할 수 있게 된다.

 

간혹 지속적인 통증이나 예사롭지 않은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 중에 신체기능은 문제가 없으나 감각기관이 예민해져 무시해도 좋을 작은 불협화음을 크게 증폭하여 느끼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들이 호소하는 불편이 신체의 문제인지 감각의 문제인지 판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만약 고통의 원인이 예민한 감각기관에 있다면 무턱대고 신체를 손보려하기보다는 감각이 예민해진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예민한 감각기관은 마치 고장 난 자명종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인을 깨우는 정말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10)




3. code(암호)

 

슈뢰딩거가 주장한 다원자에 의한 통계적 법칙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자가 불규칙한 운동을 함에도 생명이라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지만, 그것으로 생명 현상을 모두 설명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얻어지는 질서는 어떠한 의도 없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원자들이 질서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관찰하니 그렇더라는 결과론일 뿐이고, 앞서 언급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생명체뿐 아니라 그 어떤 닫힌계에서도 공통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인 물리법칙이기 때문이다.11)

 

슈뢰딩거가 설명하고 싶었던 생명 현상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수정, 성숙, 쇠퇴 및 죽음을 포함하는 명확한 수명주기를 갖는 생명체가 이 수명 주기 동안 형태와 기능에 상당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완전무결함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12)

 

실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성장 발육을 시작하여 유아기, 청소년기, 성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친 뒤 죽음을 맞이하며, 그 사이 우리 신체는 형태와 기능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는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는 노화하거나 손상되어 수시로 새것으로 교체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은 굳건히 유지되고 종의 번식을 위한 생식능력도 유지된다.

 

이는 물질이 가질 수 없는 생명체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슈뢰딩거는 우리 몸 어딘가에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밝힐 열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물학적 신비는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13)

 

이러한 노력은 그보다 앞선 1933년에 닐스 보어14)가 그 유명한 상보성 논문15)을 통해 시도했었다. 하지만 보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가진 물질의 특성과 생명의 특성이 상호 배타적일 수 있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관찰할 수 없으며,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지식의 손실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유기체의 고유한 물리적 복잡성을 설명함에 있어 보어가 주장한 것과 같은 역설과 신비를 요구하지 않았고 기능과 형태를 하나의 물질에 일치시키는 최적의 해법을 제시했다. , 생명의 신비를 화학과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물질만의 문제로 풀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과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화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를 생물학의 세계로 인도했고 그렇게 모여든 학자들은 생물학에서 분자 혁명을 일으켰다.16)


============================(8편에 계속)


[참고 문헌]

1) https://en.wikipedia.org/wiki/Atom 원자

2) https://www.aatbio.com/resources/faq-frequently-asked-questions/what-is-the-size-of-an-atom 원자의 크기는 얼마입니까?

3) https://en.wikipedia.org/wiki/Atomic_radius 원자 반경

4) https://en.wikipedia.org/wiki/Molecule 분자

5) https://en.wikipedia.org/wiki/Ion 이온

6) https://en.wikipedia.org/wiki/Particle 입자

7) https://en.wikipedia.org/wiki/Wind 바람

8) https://en.wikipedia.org/wiki/Brownian_motion 브라운 운동

9) https://en.wikipedia.org/wiki/Diffusion 확산

10) 에르빈 슈뢰딩거. 서인석, 황상익 역,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울엠플러스. 1992. P 32-50

11) 에르빈 슈뢰딩거. 서인석, 황상익 역,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울엠플러스. 1992. P 43-47

12)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42438-020-00149-w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디지털 예언으로서

13) 에르빈 슈뢰딩거. 서인석, 황상익 역,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울엠플러스. 1992. P 28

14) https://en.wikipedia.org/wiki/Niels_Bohr 닐스 보어

15) https://www.nature.com/articles/131457a0 빛과 생명

16)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42438-020-00149-w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디지털 예언으로서